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촌-태릉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950년 6월 24일 당시 (구)수도사단, 지금의 [[제7보병사단]]은 경기 북동부를 맡고 있었으며, [[동두천]]에는 제1연대, [[포천시|포천]] 방면은 제9연대가 맡고 있었다. 그리고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북한군은 이 지역에 사전 배치된 제3사단과 제4사단, 제105기갑여단 등의 병력으로 동두천과 포천, 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고자 하였다. 이를 위해 [[동두천 전투]]가 시작되었고, 포천 또한 [[포천 전투]]로 급박해졌다. 이처럼 전황이 급박해지자 육군본부는 [[수도방위사령부|수도경비사령부]]의 제3연대 병력을 포천 방면으로 급히 보내는 한편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중이던 생도들도 전투부대로 편성해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.[*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1948년 9월 국군이 창설된 뒤 입교한 생도 1기(262명)와 최초의 4년제 생도로 1950년 6월 1일에 입교한 생도 2기(334명)가 교육을 받고 있었다.] 이에 육군사관학교장 [[이준식(군인)|이준식]] 준장은 비상소집돼 학교로 복귀한 생도 1기 262명 전원과 생도 2기 277명 등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해 곧바로 전선으로 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